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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아리랑소개

"예도 옛적 고을 이름은 무릉도원(武陵桃源)이더라, 산이 높고 울울청청하여 머루랑 다래랑 먹고 살고 지고, 철따라 복사꽃 진달래꽃, 철쭉꽃 강산을 불태웠다네. 휘도는 골짜기에 굽이치는 강물은 흥건한 젖줄기 되어 물방아 돌고 철철 콸콸 청렬(淸冽)하게 흘러 욕소(浴所)하면 마음은 등선하고 아우라지 뱃사공에게 떠나가는 임을 근심하던 아낙네의 그윽한 정한(情恨)이 서럽도록 그립던 터전이었노라. 자연따라 인심 또한 정결하고도 의연하매 우국충절의 기개도 산세처럼 준열(峻烈)하던 고장이 여기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삶의 애환이 구성진 선율을 타고 넘나들고 나라사랑의 애정과 불의에 항거하던 의기가 그칠 줄 모르게 이어지는 유장한 가락 속에 스며있는 정선아리랑은 우리 선조의 얼과 멋이 승화된 빛난 이고 장의 문화재이러니 아득한 옛날부터 토착민의 생활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표출되어 불려오던 이 토속적 풍류가락은 고려말엽에 이르러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켜 지금의 남면 거칠현동(南面 居七賢)에 낙향 은거하였다는 선비들의 애특한 연군(戀君)과 망향의 정한이 더하여져 더욱 다감한 노래가 되었으리라.

본래는 「아라리」라고 일컫던 것이 세월이 흘러감에 어느새 보편적인 「아리랑」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으니 아리랑이란 누가 나의 처지와 심정을 「알리」에서 연유된 듯 하더라, 이에 무형문화재 정선아리랑은 정년 우리들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니라,…"
<1977년 10월 1일 「정선아리랑비문」 중에서>

우리나라 영서, 영동지방에 분포되어 예부터 토착민들에 의해 구전되어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이 고장민요 정선아리랑은 일명 「아라리」라 부르고 있다. 이렇게 구전되어 아라리가 역사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고 중흥을 가져온 것은 지금부터 약 600여 년 전인 조선왕조 초기라 전한다.

당시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고려왕조를 섬기고 벼슬하던 72명의 고려유신 가운데 일곱 분(전오륜, 김충한, 고천우, 이수생, 신안, 변귀수, 김위)이 송도(松都)에서 은신하다가 정선(지금의 남면 거칠현동)으로 은거지를 옮기어 일생동안 산나물을 뜯어먹고 생활하면서 지난날에 모시던 임금님을 사모하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다짐하며 입지시절의 화상과 가족,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곁들여 고난을 겪어야 하는 비통한 심정을 한시로 지어 율창(律唱)으로 부르던 것을 지방의 선비들이 듣고 한시를 이해 못하는 사람들에게 풀이하여 알려주면서 지방에 구전되던 토착요에 감정을 실어 부른 것이 오늘에 전하여 지고 있는 아리랑의 가락이며, 그 후 사화(士禍)로 낙향한 선비들과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애창하였고 전란과 폭정 시에는 고달픈 민성(民聲)을 푸념하며 내려오다가 「아리랑 아리랑」하는 음율(후렴구)을 붙여 부르게 된 것은 조선조 후기(또는 경복궁 중수 시)라고 한다.

한일합방 후부터 일제 말엽까지에는 나라 없는 민족의 서러움과 한(恨)을 애절한 가락에 실어 스스로를 달래 왔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사상이 담긴 노래는 탄압됨에 따라 애정과 남?여 관계의 정한(情恨)을 소재로 한 새로운 노래가 많이 불리어 졌으며, 이후 광복과 전란을 거쳐 대한민국 수립기에는 잠시 잠복기를 거쳐 지금에 전하여 지고 있는 노래와 함께 오늘날 우리나라의 독특한 가락을 지닌 민요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